디지털 장의사

디지털 장의사와 유족 간 갈등: 정보 접근 권한과 감정의 충돌

wellnews 2025. 6. 30. 07:02

디지털 장의사가 수행하는 가장 어려운 일은 기술적인 삭제 작업이 아니다. 진짜 도전은 고인을 둘러싼 유족들 간의 감정, 의견, 기억이 충돌하는 순간이다. 고인의 이메일, 사진, 개인 메모, 영상 등은 단순한 파일이 아니라 유족 각각에게는 추억이자 민감한 사적 영역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디지털 장의사는 종종 유족 간의 갈등 한가운데에 놓이게 된다. 누군가는 고인의 SNS를 추모 계정으로 남기고 싶어 하지만, 다른 가족은 완전히 삭제되길 원한다. 개인정보 보호, 기억 보존, 감정 회피 사이에서의 줄타기. 이 글에서는 디지털 장의사가 실무 현장에서 마주하는 유족 간 갈등 사례와 정보 접근 권한이 법적·정서적으로 충돌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디지털 장의사 유족 갈등


누가 고인의 디지털 자산을 결정할 수 있는가?

디지털 장의사가 처음 의뢰받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은 ‘누가 이 작업을 요청했는가?’이다. 실제로 유족 중 한 사람의 요청만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지만, 다른 가족 구성원이 이를 모르고 있다면 이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를 들어, 자녀가 아버지의 계정 삭제를 요청했지만 배우자는 이를 전혀 몰랐다가 뒤늦게 알게 되어 갈등이 시작되는 경우다. 디지털 장의사는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의뢰인의 신분을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다른 가족 구성원의 동의 여부를 사전에 확인하는 절차를 두어야 한다.
문제는 법적으로 ‘가족 누구까지가 동의해야 하는가?’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직계가족 또는 법정 상속권자가 권한을 갖는다고 해석되지만, 실무에서는 다양한 가족 형태(재혼, 이혼, 사실혼 등)로 인해 애매한 사례가 많다. 게다가 계정마다 서비스 약관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플랫폼은 상속권자만 허용하고, 다른 플랫폼은 동거인에게도 권한을 부여하기도 한다. 결국 디지털 장의사는 각 플랫폼의 정책을 이해하고, 유족 간 협의를 유도하며, 정서적 민감성과 법적 정당성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감정적 충돌: ‘삭제’가 치유가 되지 않을 때

유족 간 갈등의 본질은 단순히 정보 접근 권한이 아니다. 더 깊은 층에는 ‘고인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감정적인 해석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고인이 과거 운영하던 블로그에는 자녀와의 갈등, 개인적인 고통, 정치적 견해 등이 담겨 있을 수 있다. 자녀는 이를 ‘남겨서는 안 되는 상처’로 보고 삭제를 원하지만, 다른 유족은 ‘있는 그대로 기억하겠다’며 남기길 원한다. 디지털 장의사는 이처럼 정서적 가치가 엇갈리는 순간, 한쪽의 편을 들 수 없기 때문에 갈등을 중재하는 중립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일부 유족은 디지털 장의사의 존재 자체에 불쾌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아버지의 기억을 돈 주고 삭제한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은 현실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이때 디지털 장의사는 ‘삭제’가 목적이 아니라, 남은 가족을 위한 보호와 정리를 돕는 서비스임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갈등이 심각할 경우에는, 가족 공동 동의서를 요청하거나, 삭제를 일시 보류하고 백업 후 보관하는 방식을 제안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감정은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지만, 충분한 설명과 배려를 통해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핵심이다.


법적 공백과 디지털 장의사의 윤리 기준

디지털 장의사는 법적으로 모호한 상황에서도 일을 진행해야 하므로, 자체적인 윤리 기준을 마련해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유족 간 동의가 명확하지 않으면 일방적인 삭제 요청은 받지 않는다든가, 삭제 전 반드시 백업을 보관하며 유보 기간을 두는 등의 원칙이 필요하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더라도, 도의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면 신뢰를 잃고 이후 업무 수행이 어려워질 수 있다.
또한 디지털 장의사는 데이터 접근 시 민감한 정보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임의로 열람하거나 가족 간에 공유하는 것도 위험하다. 따라서 업무 과정에서 어떤 데이터에 접근했고, 어떤 절차를 거쳐 삭제 또는 보존했는지를 문서화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고객에게 신뢰를 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유족 간 갈등은 감정적인 문제인 동시에, 정보 주체와 관리 주체가 분리되어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이므로, 디지털 장의사는 이를 조율하는 정보 관리자이자 심리 조정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장기적 해결을 위한 제도적 기반과 중재 시스템 필요성

이러한 갈등은 디지털 장의사 개인의 역량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결국, 사회적으로 ‘디지털 사망자의 정보에 대한 법적 처리 기준’이 마련되어야 하며, 유족 간 분쟁 시 중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관이나 플랫폼이 필요하다. 특히 여러 가족이 함께 고인의 계정을 관리해야 할 때, 공동 동의 시스템이나, 데이터 분할 열람 시스템이 마련되면 불필요한 충돌을 줄일 수 있다.
일부 디지털 장의사 업체는 이미 유족 간 공동 협약서 작성을 지원하거나, 중립적인 제3자 입회하에 작업을 진행하는 서비스를 도입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삭제 서비스를 넘어서, 디지털 유산을 둘러싼 새로운 장례 문화의 정립을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법무법인, 심리상담 전문가, 종교인 등과 연계한 통합 서비스도 고려할 수 있으며, 디지털 장의사가 단독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적 상황을 더욱 전문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디지털 장의사는 정보를 다루는 전문가이자, 유족의 감정을 존중하는 정서적 조력자다. 단순히 데이터를 지우는 사람이 아니라, 기억을 지혜롭게 정리해 주는 전문가로서 신뢰받기 위해서는, 갈등을 피하기보다 조율하고 이해시키는 역량이 필수다.